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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아誦

우리 한시 삼백수 (7언절구 편) / 정 민 평역

by hawoo(하우/下愚) 2026. 6. 6.

우리 한시漢詩 삼백수7언절구 편

정민 편역

 

머리말

좋은 시를 만나면 기뻤다. 하나 하나 찌를 찔러 표시해 두었다. 아침에 학교 연구실에 올라와 컴퓨터를 켜면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매일 한시 한 수씩을 우리말로 옮기고 감상을 적어나갔다. 잊어버리고 한 3, 4년을 계속했다. 작품 한 수를 추가할 때마다 작가의 생몰연대순으로 하나의 파일에 차곡차곡 정리해두었다. 어느덧 5언절구와 7언절구가 각 3백수씩 6백수가 모였다. 연대순으로 정리해서 주욱 내려오며 읽어보니, 제법 시대마다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달라지는 것이 보인다. 통시적 정리를 겸한 셈이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작업했다. 벌써 내 손을 떠난 지 10년가량 된다. 재워둔 곳감처럼 든든해서 이따금 하나씩 뽑아 혼자 맛보곤 했다. 그 사이에 다른 작업에 치여 자꾸 미루다 보니 출판이 많이 늦어졌다. 작품을 우리말로 풀이하고 평설을 쓴 뒤에 어휘에 대한 설명을 얹었다. 한시에는 우리말 독음을 달았다.

시는 절제의 언어다. 할 말을 감출수록 빛난다. 시인이 말하지 않아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 없다. 소풍날 보물찾기가 이처럼 재미있을까? 몇 글자 안 되는 표현 너머 아마득한 성채가 솟아 있다. 그 높은 성채의 아기자기한 이면을 그저 담벼락 너머에서 기웃기웃 들여다본 느낌이랄까?

번역도 시가 되어야겠기에 3, 4조의 가락을 굳이 고집했다.

고른 시는 전적으로 고른 이의 취향이지만, 작품은 대동시선(大東詩選)이나 국조시산(國朝詩删)같은 정평 있는 선집에서 고르려고 애썼다. 작가별로 한 수씩을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몇 수씩 실은 경우도 있다. 작품성에서 놓치기 아까웠기 때문이다. 먼저 7언절구 3백수를 묶고, 잇따라 5언절구 3백수를 펴내겠다.

3백수는 시경(詩經)3백 편의 남은 뜻을 따르려 함이다. 시 삼백은 동양 문화권에서 최고의 엔솔러지란 뜻과 같다. 최고의 걸작만 망라했다는 의미다. 날마다 한 수씩 읽어나가도 휴일을 빼고 나면 근 한 해 살림에 가깝다. 편안하게 옛사람의 뜨락을 산보하는 기분으로 그 간결한 언어의 가락과 옛 시심의 안뜰을 감상하기 바란다.

 

                                                                                                 2013년 세밑 행당서실에서 정민

 

 

*

 

가야산

 

최치원 崔致遠, 857-?

가야산의 독서당에 쓰다題伽倻山讀書堂

 

미친 물결 쌓인 돌 묏부리를 울리니

지척서도 사람 말 분간하기 어렵구나.

올타글타 하는 소리 내 귀에 들릴까봐

흐르는 물 부러 시켜 산을 온통 감싼게지.

 

狂噴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광분첩석후중만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상공시비성도이 고교류수진롱산

 

광분狂噴 미친 듯이 뿜는 물결. 울다. 큰 소리를 내며 울부짖다. 중만重巒 중첩된 멧부리. 난분難分 분간하기가 어렵다. 시비성是非聲 옳으니 그르니 하며 다투는 소리. 고교故敎 는 일부러, 고의로. ‘~로 하여금~하게 하다는 사역동사. 롱산籠山 산을 에워싸다.

 

가야산으로 들어왔다. 옳고 그름 따지느라 조용한 날 없는 세상은 이제 흥미가 없다. 당나라에서 큰 포부 품고 돌아왔지만, 받은 것은 질시와 모멸뿐이다.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싶었는데, 비아냥거림과 냉대로 돌아왔다. 가야산 홍류동 깊은 계곡, 나는 이제 여기서 살겠다. 세상과 담쌓고 살겠다. 골 사이로 쏟아져 내린 물이 힘껏 바위에 부딪쳐 옆 사람 말소리도 안 들리는 곳, 나는 여기서 조용히 살다 가겠다. 분노도 지우고 슬픔도 지우고, 그래도 자꾸 세상 쪽으로 향하는 내 귀도 지우고, 그렇게 살다 흔적 없이 가겠다.

 

 

*

 

 

달빛과 산빛

 

최항 崔沆, ?-1024

절구絶句

 

뜨락 가득 달빛은 연기 없는 등불이요

자리 드는 산빛은 청치 않은 손님일세.

솔바람 가락은 악보 밖을 연주하니

보배로이 여길 뿐 남에겐 못 전하리.

 

滿庭月色無烟燭 入座山光不速賓

만정월색무연촉 입좌산광불속빈

更有松絃彈譜外 只堪珍重未傳人

갱유송현탄보외 지감진중미전인

 

불속빈不速賓 초대하지 않은 손님, 불청객. 송현松絃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나무 가지가 들려주는 가락. 탄보외彈譜外 악보로 옮길 수 없는가락을 연주함. 미전인未傳人 남에게 전하지 못한다. 알려줄 수가 없다.

 

뜨락에 달빛이 흥건하다. 대낮 같다. 자리를 깔고 앉으니, 청한 일 없는 청산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걸치며 자리로 든다. 겅중겅중 솔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면서 악보로는 잡을 수 없는 가락을 들려준다. 산속의 호젓한 삶이지만 이런 뜻밖의 기쁨이 있다. 이 보배로온 기쁨을 남에게 알려주고 싶어도 나는 아직 그 방법을 모르겠다. 말해주어 봤자 그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테니 말이다. 이 시는 최충(崔沖)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최항으로 바로 잡는다.

 

 

*

 

 

은세계

 

혜심 慧諶, 1178-1234

눈 온 뒤 대중에게 보이다因雪示衆

 

대지는 은세계로 변하여 버려

온몸이 수정궁에 살고 있는 듯.

화서(華胥)의 꿈 뉘 능히 길이 잠기리

대숲엔 바람 불고 해는 중천에

 

大地變成銀世界 渾身住在水晶宮

대지변성은세계 혼신주재수정궁

誰能久作華胥夢 風撼琅玕日已中

수능구작화서몽 풍감랑간일이중

 

혼신渾身 전신(全身), 온몸. 수정궁水晶宮 수정으로 만든 궁전. 화서몽華胥夢 황제(黃帝)가 낮잠에 화서의 나라에 가서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모습을 보았다는 고사, 길몽의 뜻으로 쓰임. 일이중日已中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다.

 

고려 때 혜심 스님이 눈 온 날 아침 법단에 올라 대중들에게 법어(法語)로 내린 말씀이다. 밤새 내린 눈 때문에 세상이 온통 은빛으로 변했다, 수정궁궐이 따로 없다. 어제까지 찌든 삶이 눈뜨고 보니 다 달라졌다. 하지만 달콤한 꿈은 깨게 마련이다. 내린 눈은 금세 녹는다. 바람은 대숲을 흔들어 쌓인 눈을 털고, 해님은 이미 중천에 높이 솟았다. 대중들아!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라. 미망(迷妄)과 집착(執着)의 고리를 끊자. 내린 눈은 다시 녹겠지만,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다. 새 눈 새 마음으로 새 세상을 맞이하자.

 

 

*

 

 

자적

 

혜심 慧諶, 1178-1234

소요산 계곡逍遙谷

 

대붕의 바람 날개 몇 만 리를 날아가도

굴뚝새 숲 속 둥지 한 가지면 충분하다.

크고 작음 다르지만 모두가 자적하니

마른 지팡이 해진 장삼 또한 마땅하도다.

 

大鵬風翼幾萬里 斥鷃林巢足一枝

대붕풍익기만리 척안림소족일지

長短雖殊俱自適 瘦筇殘衲也相宜

장단수수구자적 수공잔납야상의

 

대붕大鵬 한 번 솟아 날개를 치면 9만 리를 난다는 상상 속의 새. 척안斥鷃 굴뚝새, 뱁새. 림소林巢 숲 속의 둥지. 다르다, 차이 나다. 자적自適 스스로 만족하게 여김. 수공잔납瘦筇殘衲 마른 대나무로 만든 지팡이와 다 해져 떨어진 장삼.

 

대붕은 한 번 날개를 쳐서 수만 리 창공을 난다. 조그만 굴뚝새는 숲 속 나무의 여린 가지 하나에 둥지를 친다. 하지만 대붕과 꿀뚝새의 삶은 애초에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대붕은 대붕대로 굴뚝새는 굴뚝새대로 제 삶에 만족할 뿐이다. 뱁새는 황새 걸음을 흉내 내지 않고, 학은 오리의 짧은 다리를 비웃는 법이 없다. 저마다 생긴대로 기쁘게 살아갈 뿐이다. 내 비록 지닌 것 없는 가난한 운수납자이나, 저 부귀의 삶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내 생긴 대로 흡족하다.

 

 

*

 

 

여강

 

이색 李穡, 1328-1396

여강에서 마음이 심란하여驪江迷懷

 

천지는 가이없고 인생은 덧없거늘

호연히 돌아갈 뜻 어디로 가려 하나.

여강 한 굽이 산은 마치 그림 같아

반쯤은 그림인 듯 반쯤은 시인 듯.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천지무애생유애 호연귀지욕하지

驪江一曲山如畵 伴似丹靑伴似詩

여강일곡산여화 반사단청반사시

 

호연浩然 거침없이 큰 모양. 욕하지欲何之 어디로 가려 하나. 단청丹靑 그림.

 

가없는 천지에서 덧없는 인생들이 살다 간다. 이제 마치고 돌아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여강 한 굽이 길을 배 타고 지나려니 강산은 그림같고 시 같다. 그래! 먼 길 둘러 찾을 것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는데, 이 정도면 어떠냐고 보여주질 않는가? 이 세상 살다 가는 것이 결국은 떠돌이 삶일진대 고향을 따지고 인연을 물을 것 없다. 세월은 백대(百代)를 지나가는 과객이요, 천지는 만물이 깃들어 쉬는 여관이다. 내 예서 잠시 쉬었다 가리라.

 

 

*

 

 

그림 속

 

정도전 鄭道傳, 1324-1398

김거사의 들집을 찾아訪金居士野居

 

가을 그늘 막막하고 온 산은 비었는데

지는 잎 소리 없이 땅에 가득 붉구나.

시내 다리 말 세우고 갈 길을 묻노라니

이내 몸 그림 속에 든 줄도 몰랐었네.

 

秋陰漠漠四山空 落葉無聲滿地紅

추음막막사산공 낙엽무성만지홍

立馬溪橋問歸路 不知身在畵圖中

입마계교문귀로 불지신재화도중

 

 

막막漠漠 아득한 모양. 만지홍滿地紅 땅에 가득 붉다.

 

숨어 사는 벗을 찾아가는 길. 잎 다 떨궈 핼쑥해진 산길을 간다. 낙엽은 소리 없이 땅 위로 떨어진다. 그 사뿐한 하강. 대지 위엔 온통 붉은 비단을 깔아놓았다. 다리를 건너자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가야 할까? 물어 볼 사람 없다. 멍하니 서서 기억을 더듬는다. 먼 하늘 한 번 보고, 에워두른 산 한 번 보고, 붉은 단풍잎 깔린 길 한 번 보고, 다리께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본다. 영락없는 한 폭 그림이로구나. 찌푸린 하늘에 마음만 새틋하다.

 

 

 

*

 

 

꽃비

 

신종호 申從濩, 1456-1497

봄날을 상심함傷春

 

찻잔을 다 비우자 잠기가 가시는데

건넛집서 옥피리 부는 소리 들려온다.

제비는 오지 않고 꾀꼬리 떠나가니

뜨락 가득 붉은 비가 소리 없이 지는구나.

 

茶甌飮罷睡初醒 隔屋聞吹紫玉笙

다구음파수초성 격옥문취자옥생

燕子不來鶯又去 滿庭紅雨落無聲

연자불래앵우거 만정홍우락무성

 

다구茶甌 차 사발. 음파飮罷 다 마시다, 마시기를 마치다. 술이나 잠이 깸. 자옥생紫玉笙 자주빛 옥으로 만든 피리, 좋은 피리를 뜻함. 연자燕子 제비. 홍우紅雨 붉은 꽃잎이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형용한 표현.

 

봄날은 싱숭생숭하다. 낮잠에서 깨어 차를 우려 마신다. 더운 차 한 잔에 멍하던 정신이 겨우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런데 또 이건 무슨 일이냐. 이제 겨우 제자리에 앉혀놓은 마음이 건너편 집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 따라 또 사시 하염없는 생각 속을 맴돈다. 강남 갔던 제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조잘대던 꾀꼬리는 목청이 변했는지 며칠 새 모습도 뵈지 않는다. 마당엔 붉은 꽃비가 수북이 쌓여 있다. 봄은 또 이리 가는가,

 

 

*

 

 

배움

 

심의 沈義, 1475-?

의중에게 부치다寄宜仲

 

도 배움은 나날이 굳세짐에 있나니

곳곳마다 정미(精微)하게 따져 생각해야 하네.

머리 위로 세월은 저물기를 다투는데

젊어 이룸 없게 되면 늙어 더욱 황량하리.

 

學道非他在日强 精微到處要商量

학도비타재일강 정미도처요상량

頭邊歲月爭遲暮 少壯無成老益荒

두변세월쟁지모 소장무성로익황

 

비타非他 다른 것이 아니다. 일강日强 나날이 굳세어지다. 정미精微 정밀하고 미묘함.

상량商量 헤아려 생각함. 쟁지모爭遲暮 더디 저묾을 다투다. 소장少壯 젊고 씩씩한 나이. 로익황老益荒 늙어 더욱 황량하게 됨.

 

도는 왜 배우는가? 본체를 나날이 굳세게 하려 함이다. 공부를 해서 내 삶이 업그레이드 될 수 없다면 그런 공부는 해서 뭣하나? 정밀하고 미묘한 곳에 이르면 덮어놓고 읽지만 말고 따져서 깊이 음미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내 것이 된다. 머리위로 스쳐 가는 세월은 휘돌아 보면 어느새 스쳐 가고 없다. 젊어 이룬 것 없이 나중에 하겠다고 말하지 마라. 젊어 못한 일은 늙어서도 할 수가 없다. 금쪽같은 시간을 아끼고 아껴라. 황량한 노년을 맞기 싫다면, 지금 깨어 일하라.

 

 

*

 

 

꽃길

 

이행 李荇, 1478-1534

꽃길花徑

 

그윽한 꽃 수도 없이 인연 따라 피어나

산 오르는 오솔길을 일부러 돌아가네.

봄바람아 남은 향기 쓸어가지 말려무나

한가한 이 혹 있다면 술을 싣고 올 터이니.

 

無數幽花隨分開 登山小逕故盤廻

무수유화수분개 등산소경고반회

殘香莫向東風掃 倘有閑人載酒來

잔향막향동풍소 당유한인재주래

 

수분개隨分開 분수에 따라 피어나다. 소경小逕 오솔길. 고반회故盤廻 일부러 에돌아가다. 잔향殘香 남은 향기. 쓸다, 쓸어가다. 혹시.

 

봄동산 오솔길 따라 뭉게뭉게 꽃이 피어난다. 자꾸만 눈이 팔려 질러가는 길을 두고 일부러 샛길로 돌아돌아 간다. 봄바람이 일렁이면 숲은 온통 꽃향기로 물결친다. 저 향기 봄바람이 다 가져갈까 걱정이다. 혹 일 없는 친구가 꽃구경하겠다고 술병 하나 들고 찾으면, 기약 없이 한번 만나 한잔 술 기울려도 볼 텐데. 사람들은 바쁘다고 아우성이고, 봄 숲 꽃은 하릴없이 진다.

 

 

*

 

 

목욕

 

조식 曺植, 1501-1572

시냇물에 목욕하다浴川

 

사십 년간 몸에 얽힌 이런저런 허물들

천 섬들이 맑은 못에 깨끗이 씻어내리.

그래도 오장 안에 티끌 생겨난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

 

全身四十年前累 千斛淸淵洗盡休

전신사십년전루 천곡청연세진휴

塵土倘能生五內 直今刳腹付歸流

진토당능생오내 직금고복부귀류

 

허물. 천곡千斛 1곡은 열 말, 천 섬. 오내五內 오장 안. 고복刳腹 배를 가르다.

 

1549년 8월 거창의 감악산을 오를 때 지은 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다 맑은 물을 만나 너나 없이 풍덩 뛰어들었겠지. 땀에 전 몸을 씻다가 불현 듯 떠오른 생각이다. 이제부터 나는 어제의 나와 결별하겠다. 지난 세월 동안의 이런 저런 허물과 잘못과 나태와 잡된 생각들을 이 맑은 물에 깨끗이 씻어내겠다. 말끔히 씻어낸  환골탈태하겠다. 그래도 다시 더러운 생각들이 생겨난다면 그때는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아예 흔적도 없이 헹궈내겠다.

 

 

*

 

 

새달력

 

강극성 姜克誠, 1526-1576

새 달력에 적다題新曆

 

날씨도 사람 일도 하도 뜬금없어서

병 앓은 뒤 새 달력을 어이 차마 보리오.

알 수 없네 올 한 해 삼백예순다섯 날

비바람 몇 번 치고 기쁨 슬픔 얼말런고.

 

天時人事太無端 新曆那堪病後看

천시인사태무단 신력나감병후간

不識今年三百日 幾番風雨幾悲歡

불식금년삼백일 기번풍우기비환

 

무단無端 뜬금없다, 단서가 없다. 나감那堪 어찌 견디겠는가? 기번幾番 몇 번이나.

 

새 달력을 구해 벽에 걸며, 그 여백에 적은 시다. 행간에 풍자의 뜻이 담겨 있다. 변덕스런 날씨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람 일이나 다를 것이 없다. 큰 병 앓고 누웠을 젠 다시 새해 달력을 보지 못하려니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새 달력을 벽에 걸자 다시 마음이 심란하다. 뜻 높은 선비들 사화(史禍)에 쓸려 다 떠내려갔다. 하늘에는 예측 못할 비바람이 있고, 인간에는 알지 못할 화복이 있다지만, 올 한 해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슬픔과 기쁨의 무게는 또 어찌 될는지 전전긍긍(戰戰兢兢) 불안하다.

 

 

 

*

 

 

달 보며

 

송익필 宋翼弼, 1534-1599

달을 우러러며望月

 

안 둥글 젠 더디 둥금 늘 안타깝더니

둥근 뒤엔 어이해 저리 쉬 이우는가.

서른 밤 가운데 둥근 것은 하룻밤뿐

백 년 인생 마음 일도 모두 이와 같구나.

 

未圓常恨就圓遲 圓後如何易就虧

미원상한취원지 원후여하이취휴

三十夜中圓一夜 百年心事摠如斯

삼십야중원일야 백년심사총여사

 

취원지就圓遲 보름달로 향해 감이 더디다. 쉽게. 여사如斯 이와 같다.

 

초승달이 뜨면 언제 보름달이 되나 싶어 손을 꼽았다. 반달이 되어도 보름달을 기다렸다.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 가는 시간은 더디기만 하더니, 보름달이 반달이 되고 그믐이 되는 것은 어찌 이리 빠른가? 한 달 서른 날에 온전히 둥근 것은 따지고 보면 우리 사는 인생도 그런 안타까운 기다림의 연속일 뿐이다. 애타게 소망하고, 막상 그 소망을 이루면 다시 딴 것을 소망했다. 바람은 는 먼 곳에 있었고,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기쁨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갔다.

 

 

*

 

 

수선화

 

신위 申緯, 1769-1847

수선화水仙花

 

얄미운 매화가 피리 소리 재촉터니

고운 떨기 떨어져서 푸른 이끼 점 찍네.

봄바람 살랑 불자 물결도 푸르른데

눈길 고운 미인은 오는가 안 오는가

 

無賴梅花擫笛催 玉英顚倒點靑苔

무뢰매화엽적최 옥영전도점청태

東風吹縐水波綠 含睇美人來不來

동훙취추수파록 함제미인래불래

 

무뢰無賴 믿을수 없는, 버릇없는. 엽적擫笛 피리를 연주하다. 옥영玉英 옥같은 꽃떨기. 전도顚倒 꺾여 떨어짐. 취추吹縐 물 위에 주름을 불어 가다. 함제含睇 눈길을 머금다.

 

김유근(金逌根, 1785-1850)이 신위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매화의 일은 이미 지났고, 수선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적료하고 견디기 힘든 아침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기뻐서 지었다는 시다. 매화꽃 피었으니,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기지개 편다. 봄 술잔을 나누자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매화꽃은 벌써 져서 땅 위로 진다. 봄바람이 강물 위에 잔주름을 만들면, 물결은 열심히 그 주름을 편다. 그러는 사이에 침침하던 강물에 초록빛이 짙어온다. 아! 매화꽃 지고, 봄물이 푸르러 가는 이때, 목 빼고 기다리는 수선화 아가씨는 어째서 여태 소식이 없는가?

 

 

*

 

 

권면

 

신기선 申箕善, 1851-1909

독서하는 제생들에게 주다示讀書諸生

 

가슴속에 한 점 띠끌 용납하지 않으니

갈고닦아 거울 빛이 환하고도 새롭구나.

어이하여 환히 밝은 보배를 던져두고

취해 살다 꿈에 죽는 사람 즐겨 되려 하나.

 

方寸不容一點塵 磨來磨去鏡光新

방촌불용이점진 마래마거경광신

如何擲却光明寶 甘作醉生夢死人

여하척각광명보 감작취생몽사인

 

방촌方寸 사방 한 치, 마음의 비유. 불용不容 용납하지 않다. 내던지다. 광명보光明寶 빛나는 보배. 감작甘作 즐겨~이 되다. 취생몽사醉生夢死 술 취해 살다가 꿈속에 죽다, 아무 정신 없이 사는 생활.

 

열심히들 공부하게. 마음속에 띠끌 하나도 허락해서는 안 되지. 절차탁마(切磋琢磨), 갈고닦고 하다 보면 빛나는 광채가 쏟아져나오게 된다네. 마음에 빛나는 보배를 품고서, 이를 갈고닦아 제 빛을 밝힐 생각들은 하지 않고, 허랑방탕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허망한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이 마음이란 것이 잠시만 닦지 않고 방심하면 금세 때가 덕지덕지 끼는 것일세. 열심히들 공부하게. 그 빛으로 이 나라를 환하게 밝혀주게.

 

 

 

우리 한시 삼백수7언절구 편. 지은이 정민.

201412713쇄 발행본. 펴낸 곳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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