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의 시 엮음집
『최영미의 어떤시, 안녕 내사랑』
*
혼자 웃다 獨笑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양식이 있으면 먹어줄 자식 없고
아들이 많으면 주릴까 근심하네
높은 벼슬 한 사람 어리석기 마련이고
재주 있는 사람은 그 재주 펼 데 없네
한 집안에 완전한 복 드문 법이고
지극한 도(道) 언제나 무너져 버리네
애비가 검소하면 자식이 방탕하고
아내가 영리하면 남편이 어리석네
달이 차면 구름을 자주 만나고
꽃이 피면 바람이 불어 날리네
모든 사물 이치가 이와 같은데
아는 사람 없음을 홀로 웃노라
- 송재소 옮김
1804년 7월에 유배지 강진에서 쓴 시인데, 창작된 때와 장소를 안다는 게 놀랍다. (내가 죽은 뒤 ‘공항철도’가 언제 쓰였는지 사람들이 알까?) 자신을 총애하던 정조가 죽은 뒤 마흔세 살 팔팔한 학자의 절망이 “그 재주 펼 데 없네”에 숨어 있다.
6행의 원문은 “至道常陵遲”인데 지도(至道)가 뭘 의미하는지? 궁극의 도리? 능지(陵遲)는 구릉이 세월이 지나며 평평해진다는 뜻. 한때 최선이었던 길, 지극한 사상도 시간이 지나면 쇠퇴한다.
다산의 시는 음풍농월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와 인생의 모순을 정확하게 묘사한 시와 산문, 그 치열한 사실주의를 나는 사랑한다. 오백 권에 이르는 그이 저술 중에 살아남은 건, 시와 산문 뿐이지 않은가. 목민심서 등 사상서들이 당대에 활용되었는지? 그리 가르침을 따랐다면 조선이 망하지 않았겠지. 실사구시적으로 말해, 현실에 적용되지 못하는 사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리 훌륭한 논리도 시간이 지나면 썩고, 푸른 것은 오월의 나무뿐인걸.
*
목욕하는 사람아 沐浴子
이백(李白 701~762)
향수로 머리 감았다 해서
갓 티끌 튕기지 말 것이며,
난초 담근 물로 몸 씻었다 해서
옷 먼지 털지는 마소.
사람 사는 세상
지나친 결백은 삼가나니,
도에 지극했던 사람들
제 본색 감추기를 귀히 여겼더라네.
창랑(滄浪) 물가에 고기 낚던 이 있었다니,
내사 그이나 찾아 가려네.
- 이병한 옮김
이백의 시들을 읽다가 술 타령 달 타령에 염증이 나, 술이 나오지 않는 시를 찾다 〈목욕하는 사람아〉를 발견했다.
“새로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갓의 먼지를 털고, 새로 몸을 씻은 자는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턴다”는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되받아치며 이백은 지나친 결백을 삼가고 본색 감추기를 귀히 여기라고 말한다.
창랑(滄浪: 한수이강의 지류)에 고기 낚던 이는 굴원과 대화를 나누던 어부. 고결한 몸에 세속의 먼지를 묻히지 않겠다는 굴원에게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노래를 남기고 어부는 사라졌다. 청렴결백을 자랑 말고 세상에 따라 변하라, 깨끗함에 집착하지 말라는 깊은 뜻 아니던가. 지나친 결백은 나에게도 불편하고 타인에게도 불편하다.
*
서림사의 벽에 쓴 시 題西林壁
소동파(蘇東坡, 蘇軾 1037~1101)
가로로 보면 산줄기, 옆으로 보면 봉우리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데서 낮은데서
보는 곳에 따라서 각기 다른 그 모습.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건
이 몸이 이 산속에 있는 탓이리.
- 류종목 옮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진면목’이라는 말은 소동파의 시에서 비롯되었다. 여산을 두루 구경한 뒤 서림사의 벽에 그가 남긴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가로로 보면 산마루, 옆에서 보면 봉우리.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건 내가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 밖에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그가 유배되어 밖에 있었기에 도달한 이치가 아닐까.
시문학뿐 아니라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던 소동파. 자유로운 듯하나 절제된 아름다움, 그의 작품은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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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가게에서
최영미
사과는 복숭아를 모르고
복숭아는 포도를 모르고
포도는 시어 터진 밀감을 모르고
이렇게 너희는 서로 다른 곳에서 왔지만
어느 가을날 오후,
부부처럼 만만하게 등을 댄 채
밀고 당기며
붉으락 푸르락
한 세상이 아름다워지려는구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수록된 〈과일가게에서〉는 나의 등단 시다. 1992년 추석 무렵, 평창동 부모님 집으로 가는 길에 과일가게를 지나치다 흘낏 눈에 걸린 붉으락 푸르락. 매일 먹는 사과, 익숙한 이미지인데 왜 시각적 충격을 받았는지. 버스를 타고 가다 스치듯 보았기에 그 속도감에 과일은 사라지고 색채만 남았고 ‘반 구상, 반 추상’의 색채대비가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 시의 묘미는 ‘붉으락 푸르락’ 이웃한 과일의 다른 색, 그리고 서로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의 (화난) 표정을 동시에 표현했다.
버클리 대학의 ‘lunch poem’ 행사에 초대되어 영어로 번역한 〈과일가게에서〉를 내가 낭송했다. “beautiful”이 끝나기도 전에 터지던 감탄과 박수 세례. 그날 저녁 파티에서 교포 선생님에게 과일바구니 선물 받고 행복했었는데···.
행복은 잠깐. 삶은 여전히 붉으락 푸르락.
*
후기
지난 일 년 간 어느 일간지에 연재한 「최영미의 어떤 시」를 모아 책으로 엮었습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의 명시 50편을 소개하고 짧은 해설을 붙이며 저도 잊고 살았던 시 읽기의 재미에 함뻑 빠졌습니다. 어떤 시는 우리른 다른 곳으로 데려가지요. 4천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인류가 남긴 길가메시 서사시를 (물론 제가 고대 수메르어나 아카드어를 알지는 못합니다.) 영어 텍스트를 한글로 번역하며 머나먼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 고대인들을 만난 듯 흥분했답니다.
1부의 끝에 중국 시 문학의 시작인 시경과 굴원의 초사,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치하고, 그 뒤에 도연명과 소동파의 시들을 넣어 시대 순으로 중국의 시가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허난설헌-김명순-나혜석-, 허영자-천양희-문정희 선생님으로 이어지는 여성시의 흐름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2부에 연이어 배치했습니다.
.....
시는 인류 문명의 꽃입니다. 옛 사람들의 지혜와 열정이 살아 숨쉬는 시들을 읽으며 잠시 쉬어가시기 바랍니다. 시에는 시간과 고통을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시의 바다에서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나는 경험을 하시기를···
2022년 봄
최영미
『최영미의 어떤 시, 안녕 내사랑』 엮고 쓴 이. 최영미
2022년 9월 22일 1판 3쇄 발행본. 펴낸 곳, 이미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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