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치세어록』 / 안대회 초록, 지음
난세를 사는 이 땅의 리더들을 위한 정조의 통치의 수사학
글 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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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치세어록』은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 대왕의 어록을 뽑아 번역하고 해설한 책이다.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이름은 이산李祘이다. 1796년 『규장전운奎章全韻』을 반포하며 이름의 발음을 이성으로 바꿨다. 영조의 둘째 아들 장헌세자(莊獻世子,일명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 영조와 함께 조선의 부흥시대를 열었다. 정조가 돌아간 이후 사람들은 그가 통치한 시대를 건릉성제(健陵盛際, 건릉은 정조의 왕릉 이름이고 성제는 융성한 시대라는 뜻)로 불러 조선 후기의 태평성대로 추억하였다.
왕조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호감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국왕이 바로 정조대왕이다. 그와 대결할 만한 국왕으로는 오직 세종이 있어 전기의 세종, 후기의 정조는 서로 짝을 이뤄 성군聖君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같은 이미지는 경제와 국방, 민생과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이뤄낸 성과 같은 구체적 실적이 뒷받침된 바탕 위에 세워졌다. 굳이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이다.
정조가 통치한 시대는 조선시대 역사상 최고 수준의 역량을 보인 시대이다. 그 이후 조선이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은 것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우뚝 도드라져 보인다. 어떤 분야 어떤 주제를 놓고 말해도 가장 수준이 높은 단계는 대체로 이른바 건릉성제로 돌아간다. 나만의 편견인지는 몰라도 그렇지 않은 분야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융성한 시대를 정조가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과장이다. 그러나 정조가 그런 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다고 말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정조는 그 시대의 추이를 조용히 지켜본 제왕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이끌어간 제왕이기 때문이다. 그 융성한 시대가 영조시대 이후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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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성제를 이끈 통치자의 덕목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 덕목 가운데 꼭 집어야 할 남다른 점으로 나는 정조의 글쓰기를 들고 싶다. 정조는 수많은 글을 썼고 그것을 후세에 남겼다. 한국의 역대 통치자 가운데 글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이 바로 정조다. 청나라에도 건륭제라는 글을 많이 쓴 황제가 있기는 하지만 정조처럼 글을 많이 쓴 통치자는 세계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어릴 때부터 날마다 일기를 써서 훗날 국가의 편년체 사서史書인 『일성록日省錄』의 모태가 되게 하였다. 근자에 큰 주목을 끈 어찰御札도 숱하게 남겼다. 글쓰기를 좋아한 그의 버릇은 유별나다.
게다가 정조는 중요한 글의 대부분을 자신이 직접 썼다. 예나 지금이나 통치자는 글을 많이 쓰지도 않고 설령 쓴다 해도 글을 담당한 문사가 대필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다. 구한말 국왕인 고종의 방대한 문집이나 현대 대통령의 호화스런 문집에는 그럴듯한 글이 많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본인이 직접 쓴 글이 과연 얼마나 될까? 거의 대필한 글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조는 직접 글을 짓고 직접 썼다. 그 점은 정말 특별하다. 한 술 더 떠 말도 많이 했다. 정조는 과묵한 군주가 아니었다. 말과 글이라는 의사소통의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통치이념과 마음을 분명하게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밝혔다. 정조가 통치한 시대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나 실제로는 온갖 신분과 당파, 지역과 종교 갈등의 문제가 폭발 직전인 사회였다. 그리고 그의 글과 말이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먹혀들었다. 정조가 통치하는 동안 숱한 갈등은 수면 아래로 잠복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정조는 글과 말을 적극적으로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한 말의 정치가였다. 신하들과 자주 대화의 자리를 갖고 다양한 주제로 논쟁을 했다. 그는 수동적으로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 들이는 타입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신하에게 강요하기도 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같이 화내고 자기 의사를 남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그는 어느 국왕보다도 자주 대궐 밖으로 나가 시민들은 불러모아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자기의 의도를 밝혔다. 심지어는 굶주린 지방의 백성들이 서울에 떼를 지어 몰려오자 정조는 직접 그들을 만나 사연을 듣고 위로하였다. 지방을 자주 순행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정조는 백성들과 신하들을 직접 대면하여 의사를 소통하는 것에 큰 비중을 두었고, 글을 통해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밝힘으로써 나라를 이끌고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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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은 군대와 제도, 권력과 재정이 근간이다. 정조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정조는 글과 말이란 수단을 활용하여 사색당파로, 지역 간 이해관계로, 신분의 차별로 조각난 나라를 슬기롭게 통치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이나 백성들로 하여금 국왕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한 가지 재능만 갖고 있어도 국왕은 언제나 자기를 인정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였다. 자신이 능력을 갖추지 못해서 그렇지 능력만 갖춘다면 우리 대왕은 자기를 등용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건릉성제의 백성들은 계층과 지역을 떠나 우리는 소외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그것은 군대와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백성의 정서가 아니다.
정조는 그 자신이 위대한 학자였다. 그가 남긴 어록을 통해 그 깊이와 넓이를 넉넉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 국방만이 아니라 인생과 학문에 관해 폭넓은 관심을 기울여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관한 생각을 친절하게 말하고 있다. 정조가 한 말은 그 시대의 증언이기도 하고, 지금도 여전히 건강한 의의를 지닌 말씀이기도 하다. 특정한 주제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주제에 걸쳐 있다. 곳곳에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욕망과 따뜻한 인간미가 스며 있다. 위대한 학자와 문인과 예술가가 활동하고 배출된 건릉성제를 일군 밑바탕에 정조의 리더십과 건강한 인간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록은 말해준다.
정조에 매력을 느끼고 그를 깊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깊이 있는 저작이 기대만큼 많지 않은 현실이다. 그렇다고 방대한 저작과 사료를 일일이 읽는다는 것은 전문 연구자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이 책은 그렇게 정조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의 독서를 돕고자 기획되었다.
정조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의 모습과 통치자가 되는 길과 사람답게 사는 길을 그의 육성을 통해 접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011년 10월 31일
대모산 아래에서 안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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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사이의 세가지 통쾌한 일
요즈음에는 평소에 독서하는 사람이 드문데 그런 현상이 나는 너무도 이상하다.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일찍부터 이렇게 생각해 왔다.
첫째로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진리를 배워서 성인이 펼쳐놓은 깊고도 미묘한 비밀을 들여다본다. 둘째로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별하여 천년의 긴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시원스레 해결한다. 셋째로 호방하고 힘찬 문장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내어 작가들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화의 오묘한 비밀을 캐낸다.
이것이야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 일이다. 이 세 가지가 시험에 합격하려고 억지로 하는 공부나 남들이 쓴 구절을 이용해 짓는 글과 견주어 말할 것이랴!
안타깝구나! 풍속과 습관이 이미 뿌리박혀서 몇 마디 말로는 돌이키기가 불가능하다.
敎日 近來人鮮有平居讀書者, 予甚恠之. 天下之可豔可貴者, 豈有如讀書窮理者乎? 予嘗以爲窮經學古而窺聖人精微之蘊, 博引明辨而破千古不決之案, 宏詞雄文, 吐屬寯穎, 而步作家之苑, 奪造化之妙, 此乃宇宙間三快事. 是豈帖括尋摘之學所可擬議者? 而惜乎習俗之已痼, 不可以言語挽回也. 『홍재전서』 권162, 『일득록日得錄』2, 「문학」
교일 근래인선유평거독서자, 여심괴지. 천하지가염가귀자, 기유여독서궁리자호? 여상이위궁경학고이규성인정미지온, 박인명변이파천고불결지안, 굉사운문, 토속준영, 이보작가지원, 탈조화지묘, 차내우주간삼쾌사. 시기첩괄심적지학소가의의자? 이석호습속지이고, 불가이언어만회야.
1790년 서호수徐浩修가 기록한 정조의 어록으로, 독서하지 않는 세태를 안타까워한 것이다. 독서가 다른 무엇보다 좋은 데 왜 사람들은 즐기지 않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독서와 연구보다 좋은 것은 없다는 말은 다른 군주나 학자가 했다면 체면치레나 난 체하는 말로 치부하고 말았겠지만, 정조의 말이므로 그대로 믿어도 괜찮다. 그만큼 정조는 책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즐긴 사람이었다.
그 같은 국왕 정조의 심경을 멋지게 표현한 말이 바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 일이라는 대목이다. 고전의 깊은 세계를 음미하고, 연구를 통해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밝혀내며, 세계의 비밀을 드러내 보이는 문장을 짓는 것이 그 세 가지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독서와 연구와 글쓰기가 바로 이 우주 안에서 가장 통쾌한 세 가지 일이다. 아마도 그런 쾌락은 경험한 자만이 누릴 뿐 제3자는 비웃기만 할 것이다.
정조는 국왕으로서도 국민이 독서하는 습관을 갖도록 만들 수는 없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런 우려가 있다.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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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
보내오신 말씀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어보니, 병석에서도 마음이 상쾌해져 정말 기뻣습니다. 분발하여 끼니도 잊은 채 즐길 일을 찾았다면, 그 무엇인들 도道에 들어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허나 그중에서 스스로 터득한다는 자득自得이란 두 글자가 특히나 절실합니다. 이유인즉, 독서에도 법칙이 있고, 도를 보는데도 기술이 있어섭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연구하여 대상에 정신을 몰두하면 자연히 대상을 정확하게 꿰뚫어볼 때가 생기니 이것이 이른바 자득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책 만 권을 쌓아두는 것이 책 한 권을 앍어내는 것만 못하다”고 옛 사람이 말씀하였지요. 나는 일찍이 책을 모으는 버릇이 있어 좌우의 책상에 쌓인 것들이 모두 경서였는데 널리 보자니 깊이가 없고, 영역을 확장하자니 충실함이 없었습니다. 이는 모두 마음에 터득하지 못하고 그저 방만한 독서에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런 병통까지 언급하셨으니, 삼가 더욱더 명심하여 따끔한 가르침에 보답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來諭奉讀數回, 病懷覺爽, 良可喜也. 發憤忘食, 求所以樂之者, 夫孰非人道之方, 而其中自得二字, 尤爲切寶. 蓋讀書有法, 觀道有術, 沉潛溫繹, 境與神會, 則自有脗然悟透處, 此豈非所謂自得者耶? 古人云畜書萬卷, 不如讀了一卷, 余嘗有鳩書之癖, 左右几案, 罔非經訓, 而欲博不精, 欲擴未充, 玆皆未得於心, 徒歸汗漫之科耳. 來辭云云, 攙及此病, 謹當益加銘念, 以答頂門之誨也, 他餘在奉晤時耳. 『홍재전서』 권3, 『춘저록春邸錄』 3, 「빈객에게 답한다答賓客」
래유봉독수회, 병회각상, 낭가희야. 발분망식, 구소이락지자, 부숙비인도지방, 이기중자득이자, 우위절보. 개독서유법, 관도유술, 침잠온역, 경여신회, 즉자유문연오투처, 차기비소위자득자야? 고인운축서만권, 불여독료일권, 서상유구서지벽, 좌우궤안, 망비경훈, 이욕박부정, 욕확미충, 자개미득어심, 도귀한만지과이. 래사운운, 참급차병, 근당익가명념, 이답정문지회야, 타여재봉오시이.
정조가 세손 시절에, 보좌하던 신하에게 보낸 편지다. 독서의 방법을 지적한 신하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끼니도 잊을 정도로 집중하는 것과 스스로 터득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독서하고 도를 얻는 방법이다. 그 기준을 놓고 보면, 자신은 책을 널리 보고 갖가지로 보려는 욕심 때문에 깊이와 충실함이 부족하여 결과적으로 방만한 폐단을 낳았다고 했다. 앞에서 말한 공부 방법으로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조가 청소년기를 막 벗어난 시기임을 감안하면 조숙하면서도 태도가 의젓하다.
정조는 늘 신하들과 학문을 주제로 즐겨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런 태도가 국왕이 되기 전부터 자리잡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꿔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학문에 깊이가 있었던 제왕의 말이라 그의 언급은 공부하는 자에게도 지침이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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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말하라
정말 잘 다스려진 시대에는 누구나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경』에는 “좋은 말이 숨어 있지 않았다”고 썼다.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은 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비방하는 나무를 세워놓고서 남의 장점을 취해 선으로 나아갔고, 종과 목탁을 걸어두고 사방 선비들을 기다렸다. 그들이 다스리던 시대는 대지는 평화롭고 하늘은 조화로웠으며, 바람과 비가 때를 맞춰 불고 내렸다. 백성들은 살기가 편안했고, 사방 외국이 복종하여 찾아왔기에 굳이 누가 말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혹시라도 말을 안 할까 봐 염려해서 저렇게나 말을 하라고 조바심을 내며 정성껏 권유했는데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정녕코 이 세상에서 말하는 자가 없으면 나라가 제대로 되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至治之世, 人無不言也. 故書曰嘉言罔攸伏, 堯舜禹大抵聖人也. 設誹謗之木, 取諸人以爲, 懸鞀鐸待四方之士. 當是時, 地平天成, 風調雨順, 百姓乂安, 四夷賓服. 宜若不待乎人之有言, 而遑遑然猶恐其不言若是之勤者, 何也? 誠以天下無言, 則不可以爲國也. 『홍재전서』 권9, 「장차휘편서章箚彙編序」
지치지세, 인무붕언야. 고서왈희언망유복, 요순우대저성인야. 설비방지목, 취제인이위, 현도탁대사방지사. 당시시, 지평천성, 풍조우순, 백성예안, 사이빈복. 의약불대호인지유언, 이황황연유공기불언약시지근자, 하야? 성이천하무언, 즉불가이위국야.
정조는 영조 치세 50년 동안 신하들이 국왕에게 올린 진언을 모아 『장차휘편』을 편찬하도록 지시하고 1788년 완성을 본 다음 직접 서문을 썼다. 본래는 128책이었는데 이를 60권으로 정리하여 간행했다. 옛 전적을 정리하려는 의도만으로 책을 간행한 것은 아니다. 숨은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나라 안 모든 사람에게 발언하라고 권유하는 계기로 삼았다. 정조는 역사상 지치至治의 시대에는 누구나 정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상식적으로는, 잘 다스려진 시대라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할 말이 없을 법하지만 오히려 정치와 성인을 비방하는 말은 더 많았다고 했다. 옳든 그르든 정치에 대해 마음껏 발언하도록 유도하는 것, 그것이 위대한 정치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정조는 자신의 잘못을 과감하게 비판하는 신료를 처벌하려 하지 않았다. 역사에서는 폭군일수록 언론을 탄압했고, 성군일수록 언론을 열어놓았다. “말하는 자가 없으면 나라가 제대로 되어가지 못한다”는 정조의 말은 여전히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의 말은 기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정조치세어록』 2012년 1판 2쇄 발행본.
초록抄錄하고 지은이 안대회. 펴낸 곳 도서출판 푸르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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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선생은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이라는 지금도 세상에 회자 (膾炙) 되는 유명한 말을 하였는데 비슷하게 쓰이는 말에 온고지신(溫故知新;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과는 다른 말이다. 전통을 토대로 변화와 창조를 결합하는 태도를 말하는 법고창신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세상에 유용하게 쓰일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 누가 곰팡 네 나는 고전을 읽느냐고 투덜대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변하는 세상에 발 맞추어 컴퓨터는 물론 휴대폰 속에도 숨어있는 만가지 옛 고전을 찾아 읽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처럼 오늘의 세상에도 연암선생의 법고창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것은 나만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몇 백년 아니 몇 천년의 세월을 건너와서 고전 속 성현聖賢들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크다란 깨달음과 교훈을 준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한국고전종합DB' 정조 『홍재전서(弘齋全書)』 사이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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